“최애 음식이 뭐야?” — 아이의 질문에 뇌 정지가 온 순간

아이가 물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에요?”
아이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을 때, 나는 순간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사람처럼 멈춰 섰다. 마치 빙글빙글 도는 로딩중인 유튜브처럼, 입술만 벙끗거릴 뿐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 음… 아무거나 잘 먹는데…?’
그렇다. 딱히 환장하게 좋아하는 ‘최애 메뉴’도, 그렇다고 손사래 치며 거부할 음식도 없었다. 뷔페에 가도 특정 접시를 육회나 초밥으로 수북하게 채우는 대신, 샐러드부터 탕수육까지 모든 메뉴를 사이좋게 딱 하나씩만 들고 오는 지극히 평등하고 정직한(?) 식성의 소유자. 그간은 ‘식성이 무던해서 살기 편하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해 왔다.
하지만 그날 밤, 잠들기 전 문득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천장에 막혀 날아가지 못하고 둥둥 떠다녔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그 뚜렷한 즐거움 하나를, 나는 남들보다 덜 누리고 사는 게 아닐까?’
좋아하는 게 명확한 사람은 ‘오늘 이거 먹어서 너무 행복해’라는 확실한 순간을 챙겨 가진다. 반면 취향이 없다는 건 ‘무던함’이라는 미명 아래, 그 행복의 조각들을 놓치며 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무심한 질문 한 방이 멍하니 살던 내 자아에 콩 하고 작은 꿀밤을 때린 셈이다.
당신의 투자 식성은? — 차트 도파민파 vs 묵묵한 배당파

자, 이제 당신에게 묻겠다.
주식 투자를 하고 있는 당신에게.
“어떤 주식을 좋아하나요? 어떤 투자 방식을 선호하나요?”
이 질문에도 혹시 입이 멈추지는 않는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답하지 못했던 것처럼, 막연히 “수익 나는 주식이면 다 좋지”라고 얼버무리고 있지는 않는가.
투자 시장의 메뉴판은 상상 이상으로 다채롭다.
– 1초 단위로 출렁이는 캔들 차트에서 극강의 도파민을 얻는 스캘핑 마니아부터,
– 분기마다 들어오는 배당금 알림에 “허허, 오늘도 주식이 효도하네”라며 미소 짓는 배당·수익형 투자자,
– 세상을 바꿀 신기술과 테마에 가슴이 두근거려 위험을 무릅쓰는 성장주 러버,
–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진흙 속에서 장부가치 대비 싼 주식을 굴착기처럼 파헤치는 엉덩이 중무장형 가치 투자자,
– 오직 이평선 골든크로스와 차트 패턴의 미학만을 신봉하는 감성 기술적 분석가까지.
어느 쪽이 우월하고 맞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맵싸한 마라탕부터 슴슴한 평양냉면까지 저마다의 맛과 취향이 있을 뿐이다.
진짜 문제는 자신이 맵찔이인지도 모른 채, 남들이 줄 서서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마라탕 집에 무작정 따라 들어가 매운 맛에 눈물 콧물 쏙 빼며 울고 있는 것이다. 내 취향도 모른 채 남의 메뉴판만 흘끔거리며 주식을 사 모으다 보면, 매일 밤 계좌를 열어볼 때마다 소화불량에 걸린 듯 찜찜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워런 버핏의 옷을 입는다고 워런 버핏이 되지는 않는다

투자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정답이 없다. 이것은 내가 지난 나의 투자 생활중에 시장을 바라보며 내린 유일하게 확신에 가까운 결론이다.
아무리 전설적인 투자가의 방법론을 가져다 써도, 그것이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폭풍우 앞의 이파리처럼 흔들리고 만다. 워런 버핏이 아무리 장기 보유를 역설해도, 계좌가 10% 빠지는 순간 손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에게 그 방법은 어울리지 않는다. 피터 린치의 종목 발굴법이 아무리 탁월해도, 숫자와 리포트를 들여다보는 일이 고역인 사람에게 그 접근법은 오래가지 못한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다’라고 했다.
투자에서 ‘적’은 시장이고 변동성이며 거시경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 나는 어떤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인가. 따스한 햇살 아래 낮잠을 청하는 느긋한 고양이처럼 배당금이 꼬박꼬박 쌓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인가, 아니면 먹잇감이 움직일 때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치타처럼 시세판이 요동칠 때 오히려 눈빛을 반짝이는 사람인가.
나의 경우, 전자다. 나는 지루한 투자를 좋아한다. 꾸준히 배당을 성장시키는 우량 기업의 주식을 모아가며, 복리라는 이름의 시간이 조용히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마치 귤나무 한 그루가 매년 계절을 잊지 않고 열매를 건네듯, 나의 포트폴리오도 그렇게 묵묵히 자라기를 바란다. 짜릿함보다는 신뢰. 화려함보다는 견고함. 그게 내 취향이다.
그래서 나는 하락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후 4시의 불청객 소나기처럼 거침없이 내려도,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머금고 카페의 통유리창 너머로 그것을 바라볼 줄 아는 것, 그게 내 투자의 자세다. 패닉이 아니라 관조. 이것이 가능한 건 내가 내 취향을 알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 — 투자는 결국 자기 이해의 예술이다

아이의 무심한 질문이 나를 돌아보게 만든 건, 일상 속 작은 취향 하나조차 잊고 살 만큼 나 자신에게 소홀했던 순간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파도가 휘몰아치는 주식 시장 속에서 나는 내가 어떤 투자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고 했고, 니체는 “삶의 이유(Why)를 아는 사람은 어떤 시련(How)도 견뎌낸다”고 했다. 투자도 정확히 이 문장들의 궤적을 그린다. 내가 어떤 위험을 견딜 수 있고 어떤 결실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아는 것—이 자기 이해(Self-Knowledge)가 곧 내 투자의 굳건한 뼛대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취향을 갖는다는 건 선택지를 좁히는 굴레가 아니다. 폭풍우 치는 시장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서 내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나침반을 쥐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폭락장이라는 유령이 다가와도 계좌를 내던지지 않는다.
주식 시장은 생각보다 공정해서, 자기 취향과 철학을 굳건히 지키는 자에게 결국 마지막 웃음을 건넨다.
오늘 밤 당신이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길 바란다.
“나는 어떤 투자를 할 때 진정으로 행복하고 평온한가?”
그 단순한 질문 하나가, 미지의 시장 속에서 당신을 지켜줄 가장 강력한 장비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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